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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강성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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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전남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677-5
건립연도 1643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기타 서원

관찬사료

정조 20년(1796) 8월 9일 신사

○ 상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목면이 나게 된 것은 문익점이 만리 밖에서 목화씨를 가져오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경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손수 고치에서 실을 뽑는 수레를 만들었으니 세속에서 말하는 ‘물레[文來]’가 이것입니다. 더구나 정학(正學)을 창도하고 오도(吾道)를 떠받친 공은 정몽주(鄭夢周) 등 제현(諸賢)과 나란히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하늘의 명을 받은 초기에 짐승의 털과 풀로 만든 옷을 입는 풍속을 크게 바꾼 것은 생각건대 그의 공에 만세토록 영원히 힘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태종대왕께서는 그를 강성군에 봉하시고 부조묘(不祧廟)로 하도록 명하셨으며, 세조대왕께서는 부민후(富民侯)로 추봉(追封)하시고 정려(旌閭)하여 ‘고려 충효의민공신 부민후 문익점지려(高麗忠孝衣民功臣富民侯文益漸之閭)’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선조(先朝)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르러서는 그 봉사손을 찾아서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셨으나 머뭇거리다가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여러 차례 치제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두 군데의 서원[강성서원, 도천서원]에 사액(賜額)하셨으니 전후의 은전이 더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영락하여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불쌍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불쌍히 여겨 구제하는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

용강(龍崗)의 김경서(金景瑞)는 왜놈들이 창궐하는 때를 당해 적병(賊兵)이 기성(箕城 평양)에 가득 차고 왜놈의 우두머리 소서비(小西飛)가 청화관(淸華館)에 들어와 차지하고서 호위병을 벌여 놓고 의자에 앉아 있을 때 감히 그 앞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오직 김경서가 긴 검을 들고 달려들어 능히 그의 머리를 베었으니 중흥의 큰 업적이 여기에 기초하였습니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심하(深河)의 전역(戰役)을 당하여는 적신(賊臣) 강홍립(姜弘立)의 통제를 받아 적의 수중에 잘못 떨어졌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서 6년이나 지내면서도 끝내 절개를 바꾸지 않다가 머나먼 오랑캐 땅에서 생을 마쳐 마침내 시시(柴市)의 충혼(忠魂)이 되었습니다. 그 충성과 그 절개를 우리 성상께서 남김없이 통촉하시어 특별히 김응하(金應河)의 예(例)에 따라 정려하시고 또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어 주셨으니 죽은 신하를 애도하는 은혜가 더할 나위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향을 올릴 곳이 없으니 김경서를 충무사에 함께 배향하게 해 주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진달한 두 가지 일은 예조에서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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