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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장흥 연곡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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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전남 장흥군 장흥읍 연곡길 31 (원도리)
건립연도 1698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기타 서원

관찬사료

영조 2년(1726) 3월 20일 임자


상주(尙州) 유학 김국보(金國寶)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본 고을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은 바로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두 선정신의 올바른 도학(道學)과 뚜렷한 절의(節義)는 진실로 역사책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온 세상에 소문이 났으니, 굳이 신들이 열거하여 아뢰지 않더라도 성명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들의 탁월한 덕성은 비유하자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터라 먼 후대에도 소문을 듣고 의리를 사모하기에 충분하니, 선비의 반열에 있는 자는 모두 그분들이 남긴 은택에 흠뻑 젖어 제사 지내는 곳에 표창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들이 사는 고을은 바로 두 선정신이 남긴 교화가 빠르게 전파된 곳이고 거닐던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전해 내려온 풍교(風敎)와 성대한 공렬(功烈)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눈과 귀에 뚜렷하니, 바로 기린이 떠난 들에 아직 상서로운 털이 남아 있고 봉황이 깃들었던 둥지에 아직 아름다운 깃털이 보이는 것과 흡사합니다. 공경히 칭송하면서 애모하는 분위기가 다른 고을에 비할 바가 아니라서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한목소리를 내고 힘을 다하여 원우(院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장소로 삼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숙묘조 기해년(1719, 숙종45)에 유생 권훈(權勛)이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대현(大賢)을 제향하는 서원에 속히 사액해 달라는 내용으로 상소하여 청하자 그 사안이 해당 조에 내려졌으나, 그때 성상께서 병이 깊어 온 나라가 근심하며 경황이 없던 터라 미처 회계(回啓)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승하하시는 비통한 일을 만났고 대행 대왕 때에 와서야 해당 조가 비로소 회계하였는데, 두 선정신의 자손을 원수처럼 여기는 마음을 그 선조에게까지 소급하여 제멋대로 반대하는 내용으로 아뢰었으니, 사문(斯文)이 불행하고 사기(士氣)가 꺾인 것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문교가 활짝 트여 나라에서 빠뜨린 의식에 대해 모두 차례대로 거행하고 있는데,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존주(尊周)의 의리를 밝혀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세 신하를 제향하는 사당에도 따로 예관을 보내어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으니, 절의를 숭상하고 이륜을 부지하기 위한 노력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풍교의 영향을 받은 곳마다 누군들 기뻐하며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신들이 세운 원우는 저들의 절의와 도덕이 드높은데도 아직 사액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지난날의 사람이 의도적으로 저지한 탓입니다. 신들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은 따질 것이 없다 해도 훌륭한 명현(名賢)을 제사 지내는 곳은 시골의 예사로운 원우와 현격하게 다를 뿐만이 아니니, 어찌 비교하여 동격으로 여겨서 이미 내린 명을 마구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신들이 세도에 대해 개탄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신들이 만약 소인배가 한때 반대하는 내용으로 아뢴 것에 구애되어 거듭 청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현인을 본받으려는 당초의 뜻이 존숭하지도 않고 공경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천리 먼 길을 서로 이끌고 와서 대궐 아래에서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광망함을 용서하시고 정성을 살펴 주소서.

신들이 또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서원 금지령은 숙묘조 계미년(1703, 숙종29)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원우는 특별히 훌륭한 명현을 제향하는 곳이라 하여 애당초 금지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9월에 대신이 거듭 금지령을 아뢰었을 때에도 이 원우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두 선정신의 절의가 천지처럼 드높고 일월처럼 빛나 나약한 사람의 의지를 확립시키고 완악한 사람의 성품을 청렴하게 하기에 충분하여 숙묘조에 처분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절의로 인해 이와 같은 사우에 배향하였는데 조정에서 널리 드러내는 조치가 없다면 어떻게 사기를 북돋우고 풍교를 장려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의 신하가 비록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중첩하여 설치한 서원에 사액해서는 안 된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동방의 명현을 제향하는 사우 가운데 중첩하여 설치한 곳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데, 중첩하여 설치하였다는 이유로 사액을 저지하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험 삼아 근래의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는 냉천서원(冷泉書院)도 어찌 중첩하여 설치한 곳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대현을 제향하는 곳이기 때문에 속히 사액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두 현신의 도덕과 절의는 과연 어느 수준입니까. 그런데도 그 당시 해당 조에서 중첩하여 설치한 곳이라고 핑계 댄 것은 그 의도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근래의 예가 있으니, 결코 차등을 두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일전에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과 고 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경우는 중첩하여 설치한 서원에 특별히 사액을 허락한다고 명하셨습니다. 비록 중첩하여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였어도 이렇게 부득이한 경우에는 변통한 적이 있으니, 지금 두 현신을 배향한 서원만 유독 조정의 명령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영남 70개 고을에 옛날에는 현인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날로 달라지고 나아갈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나라에서 내린 편액을 원우에 내걸어 훌륭한 절의와 올바른 도학을 장려하는 성상의 성대한 뜻을 보인다면, 선비들이 모두 다 공경하여 따르면서 절의는 숭상할 만하고 도학은 존숭할 만하다는 것을 알아차려 이에 열심히 배워서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선정신의 명성과 행실이 전하의 도움을 받아 더욱 드러날 뿐만이 아닐 것이니, 이 어찌 선비들을 격려하는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숙묘 때 특별히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을 제향하는 본 고을의 흥암서원(興巖書院)에 친필로 편액을 써서 하사하시고 비망기를 내려 ‘선비들의 나아갈 방향을 바르게 하고 그릇된 말들을 그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내린 향(香)과 친필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는 실로 숙묘조에 세속을 면려한 아주 굉장한 일입니다. 한편 우리 숙묘께서 문충공이 강화에서 순절한 일에 특별히 감동하여 일찍이 어제(御製)에 ‘세상일이 어긋나서 철통같은 요새 잃어, 나라 운명 간당간당 너무나도 위기였네. 누상에서 분신하여 문루 함께 사라졌으니, 천지는 알리라 늠름한 그 충절을.[失險金湯世事非 不堪國勢綴旒危 焚身樓上竝樓滅 忠節凜然天地知]’이라고 하였는데, 가상히 여기고 사모하는 뜻이 글을 벗어나서도 느껴지니, 오늘날의 이 일도 성명께서 선왕의 사업을 이어 나가는 의리와 관련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숙묘의 유지(遺志)를 따르고 숙묘의 성의(盛意)를 깊이 이해하여 이 원우에 편액을 내리시어 제향하는 장소를 빛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시면 사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영광이겠으며, 나라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신들이 이 내용을 엮어 승정원에 와서 바쳤더니 승정원에서 줄곧 물리쳤습니다. 아, 신들이 그동안 호소한 것은 실로 사림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승정원이 반드시 거절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시험 삼아 절의와 도덕을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두 선정신은 본디 한 시대의 추앙받는 분들입니다.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은 문정공 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주고받은 편지에 넘쳐흐르는데 학문을 전수받았다고 하였고, 또 문충공 김상용의 절의가 빛나고 수립한 뜻이 우뚝한 것을 자주 일컬었는데 글에도 흔히 보입니다. 송시열을 제향하는 냉천서원에는 중첩하여 설치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 내려진 후에 특별히 사액하였는데, 두 선정신의 원우에 대한 사액은 유독 이 금지령에 구애되고 있습니다. 한쪽은 억누르고 한쪽은 드높이면서 즉시 상소를 받들지 않아 사액의 은전을 받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승정원에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고 상신 민정중 형제의 경우는 중첩하여 설치한 서원에 사액하라는 명이 근일에 또 내려졌으니, 지금 이 두 선정신을 제향하는 서원에 사액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것입니다. 승정원도 어찌 이 점을 모르겠습니까.

신들이 사문을 위하여 천리 먼 길을 와서 상소를 올리고 대궐에 호소한 것이 두세 차례나 되는데, 애당초 승정원이 거절한 탓에 눈물을 감추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또 듣건대 고 상신 민정중 형제의 경우 중첩하여 설치한 서원도 사액하는 은전을 입었다고 하니, 선정신 송시열의 경우만 중첩하여 설치한 서원에 사액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에 서로 이야기하며 기뻐하면서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라고 하고는 또 다시 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와서 이 상소를 바쳤더니 승정원이 또 대뜸 물리쳤습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다급한 목소리로 거듭 호소하고, 상소 끝에 답답하고 불공평한 승정원의 실상을 덧붙여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한번 읽어 보신 뒤에 먼저 승정원의 잘못을 꾸짖으시고 신들의 요청을 흔쾌히 윤허하시어 사문을 빛내고 사림을 위로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김상용과 김상헌 두 신하의 충의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서원을 중첩하여 설치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냉천서원과 연곡서원 두 곳에 사액한 것은 창건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소에 연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유학 김국보(金國寶)ㆍ전황(全璜)ㆍ우석구(禹錫九), 생원 우상정(禹尙鼎)ㆍ성이황(成爾潢)ㆍ김처기(金處琦)ㆍ김처우(金處瑀)ㆍ성붕징(成鵬徵)ㆍ이희좌(李喜佐)ㆍ이구령(李九齡)ㆍ윤상사(尹尙思)ㆍ남도광(南道????)ㆍ남도유(南道輶)ㆍ조중현(趙重鉉)ㆍ성이렴(成爾濂)ㆍ이규령(李奎齡)ㆍ우석홍(禹錫洪)ㆍ조중팽(趙重祊)ㆍ성이점(成爾漸)ㆍ성이하(成爾河)ㆍ황수망(黃壽望)ㆍ남도식(南道軾)ㆍ김홍국(金弘國), 유학 김경린(金景麟)ㆍ우진주(禹鎭疇), 진사 신진기(申鎭紀)ㆍ성이호(成爾浩)ㆍ성이순(成爾淳)ㆍ김필연(金必硯)ㆍ남도철(南道轍)ㆍ이명하(李命夏)ㆍ김경창(金景昌)ㆍ김경흥(金景興)ㆍ박한태(朴漢泰)ㆍ성이항(成爾沆)ㆍ권훈(權勛)ㆍ김처형(金處珩)ㆍ이명익(李命益)ㆍ성이연(成爾演), 유학 성이원(成爾源)ㆍ신진옥(申鎭玉), 진사 이정규(李挺奎)ㆍ성이한(成爾漢)ㆍ성귀징(成龜徵)ㆍ김홍정(金弘鼎)ㆍ김홍기(金弘基)ㆍ우석범(禹錫範)ㆍ성이식(成爾湜)ㆍ성하주(成廈柱), 유학 유언위(兪彦緯)ㆍ조중태(趙重台), 생원 신광한(申光翰)ㆍ성이찬(成爾澯)ㆍ김처경(金處敬)ㆍ유언경(兪彦經)ㆍ김필태(金必泰), 유학 성이명(成爾溟)ㆍ조중직(趙重稷)ㆍ성숙(成淑), 진사 채명보(蔡命寶)ㆍ김처종(金處琮)ㆍ성이혼(成爾混), 유학 김국삼(金國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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