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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봉암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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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전남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59 (장안리)
건립연도 1697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기타 서원

관찬사료

고종 42년(1905) 10월 15일 갑인


종2품 이경하(李敬夏)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처음 태극(太極)이 나뉘어져 천지가 열리면서부터 인류의 문화가 밝게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동안 천하의 원기(元氣)를 배양시켜 준 것은 도학(道學)이며, 만대(萬代)의 강상(綱常)이 뿌리내리도록 해 준 것은 충의(忠義)입니다. 그러므로 도학자(道學者)와 충의지사(忠義之士)는 사도(斯道)의 표준(標準)이며 나라의 동량(棟梁)이니, 그런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지위를 높여 주고 그 몸이 현달(顯達)하도록 해 주며, 그런 사람이 죽으면 그 은덕을 우러르고 그 이름을 기렸습니다. 이는 그 사람에게 사정(私情)을 두어서가 아니라 명예를 세워 주어 그 후손을 권면시키려는 뜻입니다.

아, 아름다운 우리 왕조가 개국한 이래 500여 년 동안 성군(聖君)이 계속 이어졌는데, 인재를 육성하고 백성을 권면하는 데에 모두 이 도리를 써서 문화가 크게 융성하고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도학자와 충의지사가 계속 나와 역사책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성인(聖人)의 자질을 타고나셨고 중흥(中興)의 운세를 받으셨는데, 등극하신 지 40여 년 동안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것을 밝히겠다는 뜻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백성을 권면하는 교화의 뜻을 담아 학행(學行)과 충효(忠孝)가 특별한 전대(前代)의 모든 선비를 표창하여 추증(追贈)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향모(嚮慕)할 바를 알고 흥기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성조(聖朝)에서 대대로 계승해 온 가법(家法)입니다. 이에 대해 신들은 흠앙하고 송축하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데, 이와 관련하여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뢰어 은전(恩典)을 내려 주시기를 청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온 세상의 다 같은 공론이지 신들이 친한 이를 추켜세우려고 사사로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의 말씀은 도학을 흥기시키고 충의를 권장하는 방도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유념하시고 밝게 살펴 주소서.

호성 선무 공신(扈聖宣武功臣) 증(贈) 이조 참판 고(故) 변이중(邊以中)과 그의 아들 증 이조 참의 변경윤(邊慶胤)은 도학과 충의에 있어 백대의 스승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변이중은 어려서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더욱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노력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며 성리학의 본원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방도를 듣고 더욱 독실히 강론하고 연마하여 조예가 깊어진 결과, 여러 동문들이 모두 추중(推重)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이는 특별히 그를 더욱 존중하여 심지어 ‘나를 흥기시키는 사람’이라고 찬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벼슬을 하게 되어 조정에 나서자, 고 상신(相臣) 박순(朴淳)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이제 조정에 인재를 얻었으니 바야흐로 크게 쓰여질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박순이 떠나가고 차질이 생겨 조용(調用)되지 못하자, 이이와 성혼은 항상 그의 재주를 애석해하면서 세도(世道)를 한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가례고징(家禮考徵)》이란 책은 주자(朱子)의 뜻을 깊이 터득한 것이어서 당시의 여러 현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도학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임진왜란 때 그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면서 왜적을 막고 나라를 보존할 대책을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어렵고 큰 왕업을 생각지 않으시고 장구하고 원대한 계책에 힘쓰지 않으신 채, 전적으로 물러나고 피하는 계책으로 일관하심으로써 3도(都)를 지켜 내지 못하고 여러 고을이 와해되게 하였으니, 결국 군신 상하가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신민(臣民)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장졸(將卒)들은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소모사(召募使)가 계속 여러 고을을 돌아다녀도 모집에 응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성상께서 싸움을 독려하는 명을 날마다 부지런히 내려도 전승(戰勝)의 보고는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윗사람을 친애하고 윗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신민들만의 죄 때문이겠습니까. 실로 전하께서 종묘사직의 신주를 싣고 먼 지방으로 피난 가심으로써 국가의 보전을 도모할 뜻이 없는 듯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이르게 될 화란(禍亂)을 통찰하시고 민심의 향배를 깊이 살피시어 어가를 돌려 중도(中途)에 머물도록 속히 명하신 다음, 원수(元帥)의 군대와 함께 위세를 과시하고 적절하게 대책을 강구하소서. 그러신다면 장졸들이 성상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에 의지하여 적과의 싸움에 충심을 다할 생각을 할 것이며, 길이 막혀 이르지 못한 여러 도(道)의 의병들도 반드시 합세하여 모두 이르러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경(西京)의 얼마 안 되는 왜적들은 주벌할 것도 없게 되고 한양의 괴수들도 머지않아 섬멸하게 됨으로써 백성들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고 왕업도 크게 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송(宋) 나라 신하 구준(寇準)이 진종(眞宗)에게 전연(澶淵)을 친히 정벌하도록 권했던 것과 같은 계획이라 할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사람의 소행은 하늘이 반드시 응답을 하니, 사람이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망하게 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변란이 일어난 뒤로 계속하여 공구수성(恐懼修省)하면서 날마다 묘당(廟堂)의 신하들과 더불어 난리를 종식시킬 대책을 의논하고 재앙을 전환시킬 방도를 강구하며 아래로 하찮은 사람들의 말까지도 다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하나의 이치로 일관된 하늘이 묵묵히 백성을 안정시켜 난리가 빠르게 종식되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근일에는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인접(引接)하시는 것이 평소 아무 일이 없던 때보다 더 적단 말입니까. 여러 날이 되어도 국정을 의논하는 연석(筵席)에 나아가지 않으시어 시종신(侍從臣)이나 재상(宰相)들이 소회를 다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초야의 미천한 신하가 기이한 계책을 가지고 있어도 진달할 길이 없는 형편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재앙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어 하늘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고 경계하시어 충간(忠諫)을 받아들이고 정사에 게을리 하지 마소서. 그리고 모든 관사의 신료들이 어전에서 성상을 뵙고 소회를 반드시 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많은 계책이 모이고 민심이 하나가 될 것이므로 장차 화란을 종식시키고 천심(天心)에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한(漢) 나라 신하 제갈량(諸葛亮)이 ‘현신(賢臣)을 가까이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며, 좋은 방도를 자문하고 바른말을 살펴 받아들이라.’고 경계한 뜻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는 한 번은 소모사로, 세 번은 조도어사(調度御使)로, 두 번은 독운사(督運使)로 수원(水原)에서의 전투와 양천(陽川)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왜적의 목을 매우 많이 베었으며, 그가 창안한 화차(火車) 제도는, 정밀하고 날랜 것은 물론이고 심지가 연달아 발화되며 비호같이 움직였습니다. 이것으로 물자를 운송하여 군수(軍需)가 모자라지 않았고 이것으로 치고 들어가면 적의 보루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도 나누어 주어 군용(軍用)으로 쓰도록 도왔는데, 그 뒤에 권율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행주(幸州) 전투의 승리는 실지로 화차의 위력에 힘입은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무술년에 또 적정(敵情)의 허실과 군정(軍政)의 득실을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논리가 정연하고 법도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중흥(中興)의 공(功)을 논하자면 실로 여기에 힘입은 바가 많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군교(軍校)에게 공을 돌리고 자신은 기꺼이 물러났으므로 당시의 공론이 겸손하다고 칭찬하였으며, 권율은 더욱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바,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과 선무 공신(宣武功臣) 2등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충의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의 아들 변경윤은 영리함과 슬기로움을 타고났고 재주와 국량이 남달랐으며,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문간공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성혼이 그의 그릇을 매우 중히 여겨 말하기를, ‘늙은 나의 의발(衣鉢)을 물려줄 제자가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성혼이 죽자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김장생은 항상 그를 외우(畏友)로 대우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사우(士友) 중에서 누가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김장생은 답하기를,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는 정성과 실천의 독실함으로는 변 아무개만 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으니, 그가 사우(師友)에게 중망(重望)을 받는 것이 이 정도였습니다. 일찍이 친구와 이기(理氣)를 논변(論辨)하면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뜻을 주장하였는바, 그에 대한 논설을 지어 환히 밝히자, 김장생이 그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변 아무개의 학문은 사문(師門)에서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대체로 그 가정에서의 배움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애통해하였으며, 계모(繼母) 조씨(曺氏)의 나이가 90에 이르자 그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부드러운 안색으로 봉양하였으며, 어린아이의 유희를 해 가며 어머니의 뜻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조씨가 일찍이 그를 마주한 자리에서 탄식하기를, ‘내가 지금 죽을 나이가 되었고 너도 장성하였는데, 네가 과거(科擧)에 뜻이 없으니 내가 영광스러운 일을 볼 수 없겠구나.’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그는 드디어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아들이 이제 영광스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상제(喪制)에 정해진 이상으로 장례를 치렀으므로 친구들이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늘그막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을 지키면서 그의 아버지가 만든 향약(鄕約)을 고향의 부로(父老)들과 함께 준행하고 정비하였으며, 봄가을로 예(禮)와 법(法)을 강론하고 읽음으로써 효도와 우애, 예의와 겸양으로 서로 권면하도록 하여 고향의 풍속이 매우 볼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도학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변경윤은 선조(宣祖)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당론(黨論)으로 인해 논척(論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구언(求言)에 응하는 상소를 올려 어진 사람을 나오게 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며 궁궐 출입을 엄하게 하고 조정을 깨끗하게 만들자고 청하였는데, 저촉되는 말이 많아 삭출(削黜)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상소의 대략에, ‘치세(治世)를 도모하는 근본은 선악(善惡)을 분별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치고 아무리 무도(無道)하더라도 어찌 스스로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망할 길을 찾는 자가 있겠습니까. 단지 마음이 밝지 못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릇 매우 간악한 사람이 충신처럼 보이고 매우 망녕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이며,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임금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습속을 따르는 자가 순후(淳厚)한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곧은 도리를 지닌 채 아부하지 않는 자는 과격한 자로 비치고 벼슬에 나오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자로 비치며, 악을 미워하고 그른 것을 배척하는 자는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자로 비치고 붕당(朋黨)을 돕거나 결성하는 자는 마음과 힘을 합치는 자로 비쳐짐으로써 시비(是非)가 의심스럽고 사정(邪正)을 분간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임금이 혹 여기에 빠져 그것을 분변할 방도를 모른다면, 어진 자와 간사한 자의 자리가 바뀌고 일 처리가 마땅함을 잃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백성이 흩어져서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고 깨달으시어 학문에 온 힘을 쏟으시고 그것으로 사람을 취하는 근본을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 한밤에 홀로 계실 때에는 매번 김공량(金公諒)이 오래도록 천천히 참소하던 것을 경계로 삼으시어 궁궐을 바로잡으시고 조정을 깨끗하게 하신다면, 융성하던 상고(上古)의 치세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절로 다스려지는 정치가 실현될 것이며, 별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곡식이 쏟아지는 천재지변은 도리어 억만년 동안 무궁하게 이어 갈 상서가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소가 올라가자, 승정원에 엄한 하교를 내리면서 왕명을 출납하는 직임은 신중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책망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변경윤이 또 상소하여 변명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보건대, 오늘날의 나랏일은 이미 그릇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편당(偏黨)은 이미 극에 달했고 원기(元氣)는 이미 손상되었으며, 기강은 이미 무너졌고 형정(刑政)은 이미 문란해졌으며, 예의는 이미 없어졌고 선비의 풍습은 이미 투박해졌으며, 공도(公道)는 이미 상실되었고 인재 등용은 이미 혼란에 빠졌으며, 염치는 이미 없어지고 뇌물은 이미 성행하고 있으며, 조세 수탈은 이미 심각하고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으며, 변방은 이미 허술하여 오랑캐들이 침범해 오며, 온갖 질병이 발생하여 원망이 바야흐로 극에 달해 있으며, 재변이 계속 일어나 별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곡식이 쏟아지고 있으니, 그 조짐이 어떠합니까. 이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위망(危亡)이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면 사적으로는 몸을 둘 곳이 없으며 공적으로는 종묘사직을 둘 곳이 없으니, 이대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한마디 말씀을 올리고 죽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왕명을 출납하는 직임을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승정원에 하교하셨다는데, 이에 신은 통곡하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런 망국(亡國)의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임금은 언로(言路)를 크게 열어 거리낌 없이 무슨 말이든 다 하도록 해야 하는데, 언로가 아직 많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더구나 직접 막기까지 하십니까. 말의 옳고 그름은 전하께서 직접 가려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시면 되는 일이거늘 어찌 중간에서 차단하도록 하여 멀리 내다보시는 성상의 밝은 눈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 승정원에 엄한 하교를 내리시기를, ‘변경윤의 두 상소는 모두 흉악하고 괴이한 내용으로 윗사람을 범(犯)하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으니, 논죄(論罪)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날 대간(臺諫)과 승정원이 나서서 그를 구제하였고 그로 인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궁(西宮)의 변(變)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때 마침 변경윤은 상중(喪中)에 있다가 막 탈상(脫喪)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비분강개하며 직언의 상소를 올려 인륜상의 대변(大變)임을 갖추 진달하고 여러 간흉(奸凶)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열거하였는데, 그의 수천 마디 말은 모두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대략에, ‘오늘날 신료들 가운데 그 누군들 부모 형제가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부귀(富貴)를 즐길 것만 생각하고 인륜이 무엇인 줄은 모른 채, 전하 모자(母子)에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게 하면서 「사직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전하의 형제간을 이간시키려 하면서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앞에 있다.」고 말하니, 사람의 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위대한 순(舜)임금이 천자(天子)라는 귀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근심을 풀지 못했던 것은 부모의 심기를 순하게 해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료들이 전하로 하여금 부모의 심기를 순하게 해 드리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과연 경중의 구분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무경(武庚)의 반란이 관숙과 채숙이 어릴 때에 있었다면 주공(周公)도 반드시 그들을 용서했을 것입니다. 신은 그자들의 음흉함에 대해 변론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밤낮으로 속을 썩이고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서궁의 궁문(宮門)이 굳게 닫힘으로 해서 전하의 자식 된 도리가 어긋나고, 골육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함으로 해서 전하의 형제간 우애가 폐해지는 것 때문입니다. 선인(先人)들의 말에,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진실로 속히 뉘우치고 깨달아서 자신을 책망하는 전지를 크게 내리신 다음, 서궁에 문안을 드리고 진짓상을 살피는 일을 갖추 거행하심은 물론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예를 갖추어 이장(移葬)하소서. 그리고 이어 유사(有司)를 신칙하여 신하 가운데 난을 꾸민 자들을 다 주벌하도록 하신다면 의리가 이미 없어졌더라도 다시 밝게 드러날 것이며 기강이 이미 끊어졌더라도 다시 이어질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으며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한찬남(韓纘男), 정조(鄭造), 윤인(尹認), 이위경(李偉卿)의 죄를 낱낱이 진술하며 주륙(誅戮)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광해군이 대로(大怒)하여 그를 중률(重律)에 처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없음을 밝혀 구원하는 대신(大臣)이 있는 데다 상소를 대내에 두고 내리지 않음으로 인해 논죄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경윤은 스스로, 임금을 바로잡고 악(惡)을 물리치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요행히 죄를 면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치재(恥齋)’라고 자호(自號)하고는 마침내 사진(仕進)할 뜻을 접은 채 백암산(白巖山)의 자하동(紫霞洞)에 숨어 살았는데, 친구나 친척들조차도 그를 보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스스로 깨끗하게 지조를 지킬 계획을 세웠으므로 간혹 그에게 출사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詩)를 보내 사양하였는데, 그 시에, ‘부귀가 구해서 되는 것이면 마부(馬夫)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으리. 그러나 그건 천명이 있는 것, 선성이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富貴如可求 執鞭猶不辭 由來有天命 先聖豈吾欺]’ 하였습니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는 바로 변경윤의 장인(丈人)이었는데, 일찍이 태갑(太甲)과 이윤(伊尹)의 일을 가지고 묻기를, ‘맹자(孟子)가 「이윤과 같은 뜻이 있으면 임금을 추방해도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자, 변경윤이 대답하기를, ‘맹자의 이 말씀은 대체로 이윤의 뜻을 밝히기 위해서 한 말이며 또한 사직을 중하게 여기는 뜻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신하의 의리로 볼 때에는 마땅히 맹자의 「임금에게 간(諫)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떠난다.」는 말씀을 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당시에 이귀는 이미 의거(義擧)를 모의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내용으로 그의 뜻을 살펴보려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생을 마쳤는바, 그가 죽자 원근(遠近)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매우 애석하게 여겼으며, 조정에서는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신주가 있는 봉암서원(鳳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을 따서 세상에서는 ‘자하 선생(紫霞先生)’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의 충의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아아, 두 신하의 도학의 연원(淵源)과 탁월한 충의는 신들의 사론(私論)이 아니라 당시의 제현(諸賢)이 이미 찬탄하고 평가했던 바가 있습니다. 고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는 변이중의 묘갈명(墓碣銘)에서 ‘저들은 달려갔지만 그는 뒤에 남았고, 비방을 받을수록 더욱 완전해졌네. 낮아 보여도 넘을 수 없고 갈아도 얇아지지 않네. 가정에서는 선행(善行)이 쌓이는데 세상이 용납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노고를 다했는데 쓰여지지 못하였네.[彼馳而我後 愈毁而彌全 卑不可踰 磨不受磷 行積于庭 而世不容 勞施于國 而不見庸]’ 하였고,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은 만가(輓歌)에서 ‘난리 중에 얼굴을 알았고 도의를 지키는 사이 교제를 논하였네. 시절을 걱정하다 귀밑머리 희어졌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 일편단심이었네.[識面干戈際 論交道義間 憂時雙鬢白 變闕寸心丹]’ 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은 제문(祭文)에서 ‘성품은 강직하고 지기는 청명하였네. 고결한 언행에다 옳고 그름 분명했네. 집안에선 효도 우애, 관리로선 청렴 공정, 정도 지켜 흔들림 없고 곤경 속에도 태평했네. 세상길 어려움 많아 도를 감추고 죽으려 했네. 향리에 덕을 펴자 사림들이 우러르며 누차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들었네.[性質方剛 志氣淸明 危言危行 激濁揚淸 居家孝友 在宮廉公 守正不撓 處困猶亨 世路多艱 卷懷將終 鄕隣薰德 士林慕仰 屢拜床下 歎承敎訓]’ 하였고, 고 상신 이여(李畬)는 제문에서 ‘아아, 선생이시어. 남도(南道)에 빼어났도다. 강건하고 정직하며 명민하고 투철했네. 율곡을 스승으로 섬겨 정미한 도(道)에 부합하였고 효도하듯 임금 섬겨 국난에 충절 다하였네.[猗歟先生 挺于南土 剛方正直 明穎透悟 從師石潭 妙契精微 移孝事君 盡節艱危]’ 하였으며, 고 판서 홍수주(洪受疇)는 찬(贊)하기를, ‘동방의 도가 계승되어 온 천 년 중에 우뚝한 한 사람이었다. 마음속으로 송(宋) 나라의 유명한 제현들을 크게 우러르며 실천을 독실하게 하였고, 우계(牛溪)와 율곡 두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의 조예가 전일하고 깊었다.[東道千載 斗南一人 景仰濂洛 諸名賢於卷中 踐履篤實 出入牛栗兩先生之門下 造詣純深]’ 하였습니다.

그리고 변경윤이 죽은 뒤에 문원공 김장생은 몹시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자여(子餘)가 죽었으니, 다시 호학자(好學者)를 보지 못하겠구나.’ 하였는데,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이 그와 관련하여 시를 짓기를, ‘어제 사계(沙溪) 선생 뵈었는데 말씀 매우 슬펐네. 자여 먼저 돌아가니 친지를 잃었구나. 이젠 다시 호학자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 사람 위해 애통해 않고 누굴 위해 슬퍼하리.[昨見沙翁語甚悲 子餘先死失親知 從今好學無聞者 非慟夫人更慟誰]’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자여’는 변경윤의 자(字)입니다. 그리고 고 판서 임방(任埅)이 서원의 향사문(享祀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이곳에 현철(賢哲)이 대를 이어 나왔는데, 선생이 뒤를 이어서는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인륜을 밝히는 내용의 직언 상소를 올려 간흉(奸凶)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으니, 위대한 절개가 당당하여 천 길 절벽처럼 우뚝하였다. 시절을 상심하여 벼슬을 그만두고는 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서책으로 자락(自樂)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들 부자(父子)는 훌륭한 덕과 자취를 이어받아 살아서는 끝까지 쓰여지지 못했으나 죽어서 오히려 은택을 끼쳤으니, 이는 모두 두 신하에 대한 실제 기록입니다.

지금 이 두 신하가 살던 세대로부터 300여 년이 되었지만 그들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조정의 표창하는 은전에 아직 미진한 점이 있어서 작질(爵秩)이 아직 높은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표창이 아직 시호(諡號)를 주는 데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신하가 벼슬을 그만두고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인데, 자못 이런 이유로 높은 작질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성조(聖朝)의 기풍을 세우고 권장하는 방도에 있어 흠결이 아닐 수 없으며, 향모하고 흥기된 사림의 마음으로 볼 때 실로 유감이 있습니다. 혹 ‘이런 어려운 시기에 어느 겨를에 이를 의논하겠는가.’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도학이 세상에 밝혀지고 충의가 사람에게 스며든 연후에야 어려운 시대를 구제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오히려 이런 때이므로 서둘러 먼저 이를 의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학문과 식견이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두 신하를 두고 곡학아세하여 시급하지도 않은 일을 망녕되이 청하겠습니까. 이에 세상의 일치된 공론을 가지고 함께 와서 성상께 우러러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 폐하께서는 특별히 헤아리시어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법을 우러러 본받으시고 선비들의 여론을 굽어 살피심으로써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증 이조 참판 변이중과 증 이조 참의 변경윤에게 높은 작질을 추증하고 아울러 좋은 시호를 하사하심으로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권장되고 흥기될 바를 알게 하소서.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예식원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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