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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흥암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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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769외 2필
건립연도 170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송준길
기타 서원

관찬사료

承政院日記, 英祖 11年 乙卯(1735), 1223

황해도 생원 신욱(申煜)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모두 포의(布衣)를 걸치고 거친 나물밥을 먹는 천한 사람으로서 지방에서 자라 조정의 모든 득실에 관해서는 본디 신분을 벗어나 논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현인을 존중하고 덕있는 이를 사모하는 마음이야 타고난 천성에 근거하니,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 어찌 신분이 미천하다고 해서 팔짱을 끼고 침묵하여 우리 성상께서 인재를 즐겨 육성하시는 큰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향(從享)하자는 청을 세 번이나 상소로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고 지난번에 들었습니다. 이어 신치운(申致雲)이 감히 현인을 무함하고 정인(正人)을 해치려는 이전의 버릇으로 요상한 말과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엄히 배척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사로운 감정으로 잘못되게 비호하시어 공의가 들끓고 악한 무리가 기세를 더하게 되었다고 들었으니, 신들은 더욱 너무나 걱정스럽고 분한 마음과 놀랍고 의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천 리 길에 발을 싸매고 장차 배를 갈라 간을 드러내고 머리를 부수며 끝까지 통렬히 변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성에 이르러 조정에서 이미 처분이 있었고, 신치운에게 대략 책벌을 내리셨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엄히 처단하였음을 확실하게 드러내어 여론을 통쾌하게 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문에 대한 무함은 그래도 조금은 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지금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하여 신치운의 죄상을 논척(論斥)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들은 아직도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걱정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간사하고 아첨하기를 일삼는 무리들이 전하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떠한가를 엿보아서 그로 인해 머리를 들거나 숙이며 좇아가거나 피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본래 태도이며 정상(情狀)입니다. 지난 을사년(1725, 영조1)에 전하께서 신치운이 선정(先正)을 무함하여 죄과에 빠뜨린 죄를 시원스럽게 바로잡지 않으셨고, 그 뒤에 청환 요직에 마치 아무 탈이 없는 사람인 듯 거쳤습니다. 그 죄에 대한 징치(懲治)가 없이 도리어 그 악을 키우기만 하였으니 그도 무엇을 꺼려서 다시 선현을 무함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 사문의 시비는 이미 성고(聖考 숙종)께서 병신년의 처분이 있었고 또 금석과 같은 가르침을 지은 것이 어집(御集)의 말편(末編)에 실어 해와 별처럼 밝게 후손을 편안하게 해 주는 계책을 남기셨으니, 그가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선정을 모욕하는 말을 상소에 올려 성상을 현혹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는 그의 생각이 유현(儒賢)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선조(先朝)께서 이미 정하신 시비를 혼란시키려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의 마지막 비망이 아니었다면 장차 몇이나 되는 신치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사문의 한 맥이 거의 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지금 신치운의 죄를 대략 징치하였다고는 하지만 엄히 막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 전하께서 매번 난역(亂逆)이 격렬하게 된 것은 사문의 시비에 기인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문의 일에 대해 듣기 싫어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현을 존숭하면서도 그 정성을 다하지 아니하고 사당(邪黨)을 배척하면서도 지극히 엄히 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부추기고 억누르는 것을 약간 남겨 두시는 것은 우선 분쟁을 그치도록 하기 위함일 뿐이니, 나중에 제방이 점점 해이해져서 사특한 말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울까 참으로 염려됩니다. 무릇 난역이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사문이 해를 당한 때문이니, 이를 가지고 사문을 도리어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유생의 상소에서 이미 명백히 변론하였으니 지금 다시 거듭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를 막을 방법입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이를 막는 방법은 사당을 엄히 배척하는 데에 있지만 또한 선정의 도와 덕을 존숭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전하께서 선현을 존숭하는 성심을 환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백 명의 신치운이 있다고 해도 어찌 감히 질시(嫉視)할 계책을 꾸미겠습니까. 무릇 도와 덕이 있는 이를 존숭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근래 성균관과 사학 및 영남과 호남의 유생들이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한 것이 그것입니다. 대체로 종사하는 은전은 정학(正學)을 표장(表章)하여 백대토록 환하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예로부터 현인과 군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참으로 도덕이 순수하고 우리 유학의 종파(宗派)를 참으로 전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함부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참으로 사문의 큰일이며 역대로 중요하게 여겨 오던 일입니다. 오늘날 서울과 지방의 많은 유생들도 사문의 일의 체모를 알고 있는데, 두 신하의 도학이 참으로 종사에 합당하지 않다면 어찌 아부하는 소견으로 지나치게 융숭한 은전을 거행하자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문화가 번성하기가 송()나라와 거의 맞먹습니다. 유문(儒門)의 적전(嫡傳)으로서 부자(夫子)의 묘정(廟廷)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종향된 이는 모두 여덟 분의 현인이 있습니다. 이 여덟 분 현인의 정맥을 이어 우뚝하게 백세의 사표가 될 수 있는 분은 두 선정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이 두 선정의 도학에 대한 조예에 대해서는 참으로 신들과 같은 말학(末學)이 칭송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만 사림에 전해져 오는 선배들의 논의를 간략하게 진달하겠습니다. 대저 두 선정은 아주 젊은 나이 때부터 학문에 온 마음을 기울여 모두 선정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삼아 천인성명(天人性命)에 관한 깊은 이치를 들을 수 있었으니, 이는 김장생의 학문이 선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이는 도체(道體)를 꿰뚫어 보고 적확하게 알아서 의론이 정밀하기가 누에 실이나 쇠털 같았으니 참으로 동방 성리학의 종장(宗匠)인데, 두 선정이 모두 그 학문을 전수받았으니 연원(淵源)이 참되고 바르며 문로(門路)가 바르고 적확함은 이미 세상의 유생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과 의()를 함께 지니고서 명성(明誠) 양쪽에 나아가서 상달(上達)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도와 덕이 온전하게 구비된 군자가 되어 나란히 세상에 우뚝하게 서서 사문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대체로 송시열은 기질의 강의(剛毅)하고 엄정하여 가슴이 크고 깊으며 넓어서 넘을 수 없는 태산처럼 우뚝하고 끝을 잴 수 없는 하해와 같이 아득하였습니다. 식견은 뛰어나게 탁월하여 뭇 이치를 관통하였고 지조와 행실은 단정하고 확고하여 극기(克己)에 반드시 용감하였습니다. 왕도와 패도(覇道), ()와 이()의 분별을 더없이 정밀하게 살펴서 일체의 계교(計較)하는 사심을 근본부터 통렬히 끊었으니, 참으로 국가를 돕고 세상의 교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칼날이 앞에 있고 죽음이 뒤에 있어도 회피한 적이 없었습니다. 온갖 조화의 근본이 임금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격언(格言)을 다하며 숨김이 없었으며, 세상의 도리를 해치는 것이 사설(邪說)이 잘못 행해지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배격하는 논리가 엄정하고 확실하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붙잡고 있었던 것은 오직 존주대의(尊周大義)였는데, 출처와 거취를 여기에서 오로지 결단하였습니다. 위로는 역경(易經)제전(帝典)에서부터 아래로는 낙관(洛關)의 현인들의 학설까지 탐구하고 강구하여 받아들이는 자료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더욱이 주자전서(朱子全書)에 한평생 탐닉하여 자기 말을 외우듯이 하여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할 때마다 모두 법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존심(存心)과 제사(制事)가 오로지 천리의 올바름에서 나와서 덕업(德業)과 문장이 활달하고 밝았던 것입니다.

저 송준길은, 그 타고난 자질을 말하자면 정제된 금과 윤기 나는 옥과 같으며, 그 마음을 말하자면 빙호추월(氷壺秋月)입니다. 찌꺼기가 깨끗하게 제거되었으므로 심하게 힘쓰지 않아도 쉽게 융화되고, 식견이 정치하고 밝으므로 지극히 궁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치에 나아갔습니다. 외모는 온후하였지만 이해와 화복이 갈릴 즈음에 확연히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고, 말씨는 온화하고 조용하였지만 시비와 사정(邪正)에 대해서는 빼앗기 어려운 꿋꿋한 뜻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요약하는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학문을 사모하여 더욱 내면의 공부를 하였고 마음 씀이 순수하고 진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내면의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서 화기(和氣)가 성대하여 남들이 한번 보면 모두 그가 인인군자(仁人君子)임을 알았습니다. , 정통적 학문을 닦은 두 현신이 효묘(孝廟)라는 대성인을 만나 뜻이 밝게 의기투합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장차 삼대의 치적을 만회하고 춘추의 의리를 한번 펴서 공업(功業)을 이룰 날이 곧 다가오리라고 기대하였는데, 하늘이 송()나라에 복을 내리지 않아 임금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어 큰 계책이 허사가 되었고 배운 바를 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충신과 열사들이 끝없이 흐느껴 우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나라 안에 기풍을 수립하고 의리를 밝혀 5척 동자도 오히려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의리와 피폐(皮幣)를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하였습니다. 강상(綱常)은 그에 힘입어 떨어지지 않았고 국맥(國脈)이 그에 의해 유지된 것은 두 선정이 일신의 이해를 따지지 않고 몸소 대의를 밝히는 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나라에 사전(祀典)을 두는 것은 덕 있는 이를 높이고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이 두 선정의 실덕(實德)과 실공(實功)은 이미 저렇게 우뚝이 높으니 공의를 따르시어 문묘에 종향하는 일은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줄곧 신중함을 견지하느라 윤허해 주시지 않으시니, 어리석은 신들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두 선정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언론과 풍지(風旨), 행의(行義)와 사적(事蹟)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혹시 그들의 도와 덕의 높고 낮음을 전하께서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그러십니까? 무릇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에는 군신 사이를 보면 알 만한 것이 있는데,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이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을 만나고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소열(昭烈)을 만난 것이 그것입니다. , 성대하였습니다. 효묘께서는 탕왕과 문왕 같은 덕을 갖추고 한 소열과 같은 뜻을 가진 분으로 두 신하와 의기투합한 것은 참으로 이윤과 여상, 제갈 공명이 그 임금을 만난 것과 천 년이 지났으나 똑같았으니, 두 신하가 어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숙고(肅考 숙종)께서는 학문이 고명하기가 여러 왕 중에서 뛰어났는데, 특별히 어필을 내려 두 신하의 사당에 현판을 빛내 주셨습니다. 팔도에 유림의 종장(宗匠)을 모신 사당들이 즐비하였으나 화양서원(華陽書院)과 흥암서원(興巖書院) 두 서원에 대해서만 이런 특수한 은혜를 내리셨으니 성상의 뜻이 어떠하였는지를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두 현신(賢臣)의 도학을 알고자 하신다면 어찌 그들이 성조(聖祖)와 성고(聖考)께 지우(知遇)를 받았던 것을 보지 않으십니까. 무릇 두 현신의 조예가 정밀하고 깊으며 수립한 것이 탁월함이야 문묘에 종향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현재 인심이 부정한 곳으로 빠져들고 의리가 어두워져서 온 세상이 긴 밤 속에 들어 있으니, 이러한 때에 사문을 존숭하여 태양처럼 밝은 빛의 나머지를 게시하여 사방에서 보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어두움이 밝게 갤 가망이 끝내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구구한 마음에 걱정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 신하의 도와 덕이 문묘에 종사하기에 참으로 합당함을 생각하고 신들의 호소가 공론을 참으로 따른 것임을 살펴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여 사문을 흥기하고 세도(世道)를 부지(扶持)하게 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라에도 매우 다행이고, 사림에게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 상소에 연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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