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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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 (대봉리) |
건립연도 | 1692 |
문화재 지정 표기 | |
제향인 | 이사룡 |
기타 | 서원 |
◦『正祖實錄』 卷 38 - 정조 17년(1793) 9월 2일 임진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장계하기를,
"증 목사(牧使) 이사룡(李士龍)의 후손 19명과 증 참판(參判) 시문용(施文用)의 후손 14명을 모두 불러 보고 그들의 살던 곳과 사적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사룡이 살던 곳은 본 고을 북면(北面) 작촌(鵲村)에 있는데 전전 임신년110) 에 경내의 사민(士民)들이 사당을 세우고 충렬사(忠烈祠)라고 편액하였고, 제물은 관가에서 마련해준다고 하였습니다. 또 뒷산 기슭에 그의 묘가 있고 그의 7대 적장손(嫡長孫) 이광신(李光臣)이 현재 남면(南面) 조곡(租谷)에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문용은 동방에 온 이후로 동면(東面) 대동방(大洞坊)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또 집 뒤에 단(壇)을 쌓아 놓고 달마다 초하루 보름이면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답니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대명동(大明洞)이라고 부르고, 그의 후손들은 다른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사룡의 8대손 응준(應俊)은 군직(軍職)에 기용하였고, 시문용의 6대손 유영(有榮)과 7대손 한익(漢益)은 식량을 마련하여 떠나보냈습니다."
하니, 상이 이사룡 후손을 단지 그 고을에서만 수용하게 할 수는 없다 하여 그 중에서 활쏘기와 말달리는 재능이 있는 자 세 사람을 뽑아 삼군문(三軍門)의 대장들로 하여금 양식과 말을 마련하고 그들을 불러와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부직(付職)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