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_META_TITLE_ 휴관일입니다.


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옥천서원 > 관찬사료

간략정보

좌우로 스크롤하시면 전체 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위치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 (대봉리)
건립연도 1692
문화재 지정 표기
제향인 이사룡
기타 서원

관찬사료

◦『正祖實錄44 - 정조 20(1796) 326일 임신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선정신 조헌(趙憲)은 도학과 연원으로 보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으니 순절한 것은 다만 그 나머지의 일입니다. 같은 때 사람으로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증 판서 김성일(金誠一)은 모두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 자 시호를 얻었으나 선정 조헌은 근학 호문(勤學好問)의 문() 자와 강극 위벌(剛克爲伐)의 열() 자로 되어 있어 마치 대중을 따라서 전사(戰死)한 자에게 한 가지 절개를 포증한 것처럼 되었으므로 사문(斯文)의 불행과 사림(士林)의 수치가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바야흐로 성조에서 글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게 하는 때를 당해서 이와 같은 결여된 전례는 의당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비록 고사로 말하더라도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은 처음 시호가 문개(文介)였는데 고 정승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반박하고 건의하여 시호를 고쳤으므로 지금까지 이를 칭도하고 있으니, 선정의 시호 역시 다시 의논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은 결과, 제신이 다른 말이 없으므로 우상의 말에 의해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참의 이사룡(李士龍)의 서원(書院)이 성주(星州)에 있는데, 이는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목사로 있을 때 그 유허(遺墟)에 창건한 것입니다. 그후 고 판서 오도일(吳道一)이 그 비문까지 지었는데, 다만 그의 지벌이 미천한 때문에 아직껏 표장(表章)하는 조치가 없었습니다. 만약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수(祭需)를 마련해 주게 한다면 족히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사룡 한 사람이 없었다면 천하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경의 말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그의 손자 최성렬(崔性烈)이 방금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있으나 고을의 힘이 시호를 맞이하기 어려우니, 서관(西關)의 상당한 자리로 해조에 분부하여 서로 바꾸게 해서, 그로 하여금 관에서 시호를 맞이하게 하여 서쪽 지방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첫 번의 연석에서 나이가 젊고 경서를 깊이 연구한 선비들을 북돋아주고 장려하여 등용할 일로 아뢰었었습니다.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의 손자 김직순(金直淳)과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 송계간(宋啓榦)은 경학에 대한 식견과 훌륭한 행실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문벌 좋은 가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실로 성조에서 인재를 배양한 효과이니, 이 두 사람을 특별한 예로 등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옛날 세자 익위사의 관원으로 서연(書筵)에 출입하던 자로서 지금에 세 사람이 남아 있는데, 이민보(李敏輔)는 지위가 숭품에 이르렀고, 정존중(鄭存中) 역시 기로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신광리(申光履)만 중간에 유락(流落)하여 불우한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나이 또한 70세가 찼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 재신은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그 사람됨을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특별히 지중추를 제수하고, 두 중신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보내주게 하라." 하였다.

 

TOP
한국서원 제향인물 동아시아서원 서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