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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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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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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경렬사
명칭 『사계전서(沙溪全書)』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김장생(金長生)
소장정보

상세정보

김장생(金長生), 사계전서(沙溪全書), 46 - 附錄 - 擧義錄 - 유평

유평(柳玶)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공은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하였다.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인묘(仁廟)가 반정을 일으킨 뒤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곡(義穀)을 끌어 모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자, 공은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동궁을 호위하였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아들 유명익(柳明翊), 유세익(柳世翊)을 거느리고 칼을 들고서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일을 사절한 채 산자락에 집을 짓고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 붙여서 충분(忠憤)의 뜻을 붙였다. 조정에서 천거하여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림(士林)들은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으며, 경렬사(景烈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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