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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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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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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호계서원
명칭 『溪巖日錄』
문화재 지정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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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溪巖日錄, 1603~1641, 계암 金坽의 일기

溪巖日錄 一

[1605/07/21] (七月)二十一日

聞昨夜水勢益盛至于濯淸之亭中村下村無不被害。…廬江書院亦漂蕩位版僅得移出聞來驚駭尤極

아침에 들으니, 어젯밤에 물의 기세가 더욱 거세어져 탁청정에까지 이르렀고, 중촌中村과 하촌下村에 해를 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여강서원廬江書院도 떠내려갔는데 위판은 겨우 옮겨 내었다고 하니, 들려오는 것마다 놀라워서 더욱 망극하였다.

 

[1607/10/04] (十月)四日

以冊衣不稱意改之夕景望丈至焉將向廬江新院觀八日奉安禮兼爲姓會事也金君光業光夏及墋同宿余以病宿于內

맑음. 책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갈았다. 저녁에 경망景望 어른이 왔다. 장차 새로 지은 여강서원으로 가서 8일 위판을 봉안하는 것을 보고, 아울러 일족 모임에 관한 일을 보기 위해서였다. 김광업김광하 군과 김참이 함께 잤다. 나는 병 때문에 내실에서 잤다.

 

[1607/10/05] (十月)五日

朝景望丈向廬江

아침에 경망 어른이 여강서원으로 출발했다.

 

[1607/10/06] (十月)六日

朝承金栢巖令公訊問乃知昨夕來宿李士瞻家卽與平甫兄往拜之元吉逢吉亦皆侍來因聞湖南通文以己丑年雪冤事也嶺南右道因此通諭上道以二十日會仁同共議也午令公向廬江爲八日奉安位版也。…

아침에 김백암金栢巖 영공의 안부 편지를 받고서 어제 저녁에 이사첨의 집에 와서 잤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평보 형과 함께 가서 인사했다. 원길元吉과 봉길逢吉도 영공을 모시고 왔다. 이어 호남의 통문에 관해 들었는데 기축년(1589)의 억울함을 씻는 일이었다. 영남우도에서 이 때문에 상도上道로 알렸는데, 20일에 인동仁同에 모여서 함께 의논하자는 내용이었다. 오시쯤 영공이 여강서원으로 길을 나섰다. 8일에 위판을 봉안하기 때문이었다.

 

[1607/10/08] (十月)八日

廬江書院重建是日奉安位版而病未徃觀深恨深恨。… 奈城李平仲亦自江院還將至寺門嫌其姓會不入而去懇挽不留可謂固執矣昏黑九潭金仁秀字秀而又至會話法堂因聞江院之會幾二百人而供饋甚盛是會議仁同答通事差定作文人余亦差焉

흐림. 여강서원이 중건되어 위판位版을 봉안하는 날인데 병으로 보러가지 못하니 한스럽고 한스럽다. 내성奈城의 이평중李平仲도 여강서원에서 돌아왔는데, 절문 앞에 이르자 일족 모임을 꺼려하여 들르지 않고 가려기에 간절히 붙잡았지만 가버렸다. 고집이 세다고 할 것이다. 날이 캄캄하여 구담九潭에서 김인수 수이金仁秀秀而(수이는 김인수의 자)가 또 왔다. 법당에서 모여 이야기하였다. 듣자하니, 여강서원의 모임에 거의 2백 명이나 모였고 제공한 음식도 아주 푸짐했다고 한다. 이날 모여서 인동仁同의 모임에 답장하는 일을 논의하고 글 지을 사람을 선출했는데, 나도 글 지을 사람으로 뽑혔다고 한다.

 

溪巖日錄 二

[1611/04/19] (四月)十九日

早起徃鄕社謁鶴峰廟齋堂皆設前有軒臨水西出五里至白雲亭洪州亭也頗高爽臨潭松樹景致勝仙刹見洪州表姊遂渡水踰峴復涉川至廬江書院院圯於乙巳之水重新甚好養浩楼尤宏壯謁廟扁額聘君手迹字体好進學門及樓額失於水裴大維書門額甚不好。…

맑음. 일찍 일어나 향사鄕社에 나가서 학봉묘鶴峰廟를 배알하였다. 재실의 당우堂宇가 모두 갖추어졌는데 앞쪽의 난간은 강물에 임하였고, 서쪽으로 오 리를 나가면 백운정白雲亭에 이르는데 김 홍주金洪州의 정자이다. 자못 훤칠하고 시원하게 연못가에 서 있는데 솔숲의 경치가 선찰仙刹보다 더 낫다. 김 홍주金洪州의 표자表姊를 만나보았다. 드디어 강물을 건너 고개를 넘고 다시 개울을 지나 여강서원에 도착하였다. 서원이 을사년 홍수에 무너져서 다시 지어 매우 좋았는데 양호루養浩楼는 더욱 크고 웅장하였다. 사당에 배알하였다. 사당의 편액은 장인어른의 수적手迹으로 자체字體가 좋다. 진학문進學門과 문루門樓의 편액은 물에 떠내려가서 배대유裵大維가 문액門額을 썼는데 썩 좋지 못하다.

 

[1612/02/04] (二月)四日

大雪朝見伊山通文云伏聞貴院近將有事於從享云信否若然則廬江弊院亦當與聞而尙無一書相示無乃傳之者誤耶私窃恠焉夫我先生旣陞祀文廟貴院亦賜額國學則凡有大擧措決非一邑之所獨擅當議及多士洽然歸一然後乃可與道內共此縟議而今乃不然以斯文莫大之禮爲一院所私之事切恐貴院終歸於不重之地也敝院之於貴院實一體此而不言有乖於共尊先正之之意茲敢僉告伏願諒察毋俾後日或有別議以志所謄送也其辭約而盡其意婉而嚴凛然莫可議士氣當如此也食後權宅甫歷見以從祀事極爲不可凡所論議正如昨日子常勸堤叔自今勿復干預其事而且勿出入其言甚有理且止權方甫欲參享祀亦可謂先事有見也平甫兄亦至相與談論宅甫歸後兄留話至夕

큰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이산서원伊山書院에서 온 통문을 보았다. 그 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삼가 듣자오니, 근래에 종향에 관한 일이 있을 것이라 하는데 진실로 그러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강서원廬江書院과 폐원弊院에서도 마땅히 참여하여 들음이 있어야 할 터인데, 아직 편지 한 통도 보내준 일이 없으니, 이것은 말을 전하는 자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저 우리 퇴계 선생은 이미 문묘文廟에 승사陞祀하셨고 귀원貴院 또한 사액賜額을 받은 국학國學이니, 무릇 큰 행사가 있으면 결단코 한 고을에서 독단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요, 마땅히 많은 선비들과 의논하여 모두가 의견이 일치한 다음에 도내道內의 유생들과도 이 욕의縟議를 공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문斯文의 막대한 예법을 일원一院의 사사로운 일로 처리하고 말았으니, 귀원이 마침내 부중不重한 처지에 떨어질까 참으로 두렵습니다. 폐원과 귀원은 실로 한 몸이니, 이러한 때에 말하지 않는다면 함께 선정先正을 존모하는 뜻을 어그러지게 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여러분들께 고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살펴 헤아려서 뒷날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통문은 이지가 베껴서 보낸 것이다.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곡진하고 그 뜻이 부드러우면서도 엄격하여, 늠름히 더 이의를 달 것이 없으니 선비의 기상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밥을 먹은 후에 권택보權宅甫가 들러서 만났는데, 종향하는 일은 극력 불가하다고 하니, 논의한 바 모든 것이 어제와 꼭 마찬가지였다. 박자상이 제천 표숙에게 지금부터 다시는 그 일에 관여하지 말고 또 출입도 하지 말라고 권한 것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또한 권방보權方甫가 향사에 참여하려는 것을 저지한 것도 선견지명이 있는 일이다. 평보 형도 와서 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택보가 돌아간 후에도 형은 남아서 저녁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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