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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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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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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화천서원
명칭 「單子」
문화재 지정 표기
작성주체 류운룡 후손
작성지역 -
형태사항 크기:
장정:
수량:
재질:
표기문자:

상세정보

◦ 「單子, 1913, 류운룡 후손/도산서원, 1853(철종 4) 陶山書院儒林을 중심으로도산급문제현록의 간행을 준비할 당시 하회 풍산류씨 문중, 특히 柳雲龍의 후손들이 선조의 略傳과 관련하여 도산서원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의 단자

제명록에는 모두 61명이 연명하였는데, 여기에는 유운룡의 자손 뿐만 아니라 柳喬榮 등 유성룡의 자손도 포함되어 있어 풍산류씨들의 공동 입장으로 보아 무방하다.도산급문제현록은 이황 문인록의 결정판으로서 1853都都監 金基洛을 중심으로 간행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이듬해인 1854년에 54(혹은 52)으로 간행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문인의 수록 범위 또는 문인들의 행적 기술과 관련하여 상당한 논란이 제기되었는데, 풍산류씨들의 항의 또한 이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풍산류씨들은 우선도산급문제현록의 간행이 士林公論보다는 李滉의 몇몇 후손들에 의해 사적으로 진행되됨으로서 공공성을 상실하였음을 비판한 다음 선조 유운룡의 행적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하였다. , 유운룡조의 각주에 원근의 士子들이 당초에는 의귀해야 할 곳을 몰랐는데, (유운룡)이 유독 앞장서서 선생의 문하에 입문했다(遠近士子初不知依歸公獨首先負芨登門)17자는 사실무근의 조작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 부분이 합리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도산급문제현록에 유운룡의 이름을 수록할 수 없다는 것이 풍산류씨들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도산급문제현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이황을 외면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근본적인 불만이 간행위원회에 있음도 알 수 있다.사실 당시로서는 유운룡 외에도 李湛南彦經金生溟權好文鄭惟一金隆 등 상당수 문인들의 각주가 추가 또는 산삭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1856(철종 7)陶山及門諸賢錄辨訂凡例가 나오게 된 빌미가 되었다. 본 문서상으로는 이후의 사정을 확인할 수는 없느나 현재 일반적으로 이용되고도산급문제현록에는 유운룡이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單子

仰凟

僉尊鑑, 伏以程夫子有言曰, 雖公天下之事, 以私意行之, 便是私今者,

陶山及門錄刊行之擧, 不其近乎. 此錄之藏, 在各家中衙三百年未遑, 豈非諸先輩

審愼塡之極, 難重之甚者乎. 序賢而以明道統之傳, 體先而以謁同明之好, 克謹且

, 大公至正, 必成拱璧之完書, 是固及門後承之, 可當合席敦事, 而何乃

老先生本孫四五人, 擅自主張, 勘校編摩, 旣失孔子家語之體, 又非理學道錄之

, 而低昻筆削惟意之適, 是所謂憑公, 而進私者耶. 第以謙庵先祖, 註脚下遠

近士子, 初不知依歸, 公獨首先負笈登門十七字, 劍出未安之說, 累次爭辨, 不無中間,

對同歸正, 而末乃反辭執拗, 遂非不小顧忌, 此實西厓先祖所撰, 謙祖墓誌中語也.

可以質鬼神而無疑, 俟百世而不感, 而今曰未安於

老先生兮, 上則不敢固請必書, 又旣有未安之說, 而一字刪減, 則反極未安於鄙, 先祖自

處之外, 無他道理, 而何以曰自處, 處之以此錄, 未遑之前日, 不亦可乎. 且退書節要,

刊行已久, 兩先祖諱註, 載在大山翁手筆, 自可以傳信來世, 玆敢奉還, 先諱控由,

告固知, 駭妄之難逭, 而實係於不得不爾, 雖曰自外於是錄, 而豈敢自外於

陶山耶. 伏願

僉尊諒察幸甚.

癸丑十二月二十日.

 

柳蘭榮柳道弼柳成祚 柳道龜柳善榮柳熺祚柳道精柳聞榮柳道瑀柳道國柳昊榮柳道緯柳馹榮柳東秀柳日佑柳永佑柳選睦柳道松柳道泰柳道肯柳漠佑柳錫佑

柳源植柳喬榮柳鼎佑柳東郁柳道{+}柳道淵柳進五柳圭榮柳德榮柳道南柳相睦柳翰佑柳光佑柳根佑柳源榮柳萬植柳純榮柳東濬柳根榮柳顯榮柳昌植柳健睦柳震睦柳道卓

柳道弦柳東夔柳憲佑柳震睦柳瀚榮柳弘睦柳東基柳東萬柳東洛柳哲佑柳起榮柳喆佑柳道和柳道徵柳光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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