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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lture of Seown (書院:private academy)
In East Asia and Glocalism

선암서원 > 문집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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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서원 위치 건립연도 제향인 기타 안내표
연관서원 선암서원
명칭 『갈암집(葛庵集)』, 己甲辛癸錄
문화재 지정 표기
저 자 이현일(李玄逸)
소장정보

상세정보

소청일기(疏廳日記)의 대략

계묘년 정월 4일에 호계서원(虎溪書院)의 묘알(廟謁)로 인하여 동주(洞主)인 전(前) 장령(掌令) 나학천(羅學川) 및 사우(士友) 수십 명이 모여 의논하기를 “지난해에 이 선생(李先生)의 신원을 호소하는 거사가 문하(門下)의 제자들에게서 나왔으나 일도(一道)의 선비들이 일제히 규혼(叫閽)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그러한 거사가 없었으니, 어찌 오당(吾黨) 후생들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고 마침내 향교에 소청(疏廳)을 설치하기로 의논을 결정하였다.

17일에 본 고을의 향교에 60여 명이 모여서 열읍(列邑)의 사림(士林)에게 통고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갈암 선생은 우리 영남 유림의 종사(宗師)로서 억울한 무함을 입은 지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신원을 호소한 일은 겨우 약간의 문인(門人)들에게서 나왔을 뿐이고 일도의 선비들이 함께 규혼하여 유종(儒宗)을 위해 신변(伸辨)하는 거사가 있다는 것은 오래도록 들어 보지 못했으니, 이 어찌 오당 후생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선생이 무함을 입은 것은 매우 원통하다 할 만합니다. 기사년의 변고 때 선생이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소명을 받고 상경하던 도중에 금령을 무릅쓰고 소장을 지어 현(縣)ㆍ도(道)에 올렸으나 현ㆍ도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후사(喉司)에 넣었으나 후사가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선생이 충성스러운 규간(規諫)이 위로 전달되지 못하여 임금의 지나친 거조를 고치지 못한 것에 몹시 상심하신 나머지 그해 가을에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할 때 올린 응지소(應旨疏)에서 ‘처소를 이궁(離宮)으로 옮겨서 은의(恩義)를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전후로 올린 두 소장이 비록 하나는 위로 전달되고 하나는 위로 전달되지 못하였으나 처음에 올린 소장에서는 성상을 위하여 지나친 거조를 바로잡으려는 충성을 바쳤고 뒤에 올린 소장에서는 국모(國母)를 위하여 편안히 모시려는 뜻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때 성상께서 진노하여 준엄한 금령을 내려, 말하는 자는 죄가 있고 말하지 않는 자는 책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해(利害)를 돌아보지 않고 충성을 다해 직언을 올려 그 간절한 충정을 끝내 토로하고야 말았은즉 비록 그 당시에 성상의 뜻을 돌리지는 못하였으나 훗날에는 의당 죄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소장 중의 한 구절을 끄집어내어 문제로 삼고서 선생이 완곡하게 표현을 바꾸어서 말한 본의(本意)는 헤아리지 않은 채 억지로 매우 패륜한 죄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전후 30년 동안 온갖 모욕과 무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경자년 겨울에 내린 명을 도로 거둘 때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고심하여 진언(盡言)한 충성은 이미 환히 드러나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맨 처음 선생을 나추(拿推)할 것을 청한 대신(臺臣)이 도리어 그 일로 자핵(自劾)하였고 국문(鞫問)에 참여했던 대신도 역시 평반(平反)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사년 소결(疏決)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묘당(廟堂)이 그 죄상이 애매함을 밝히고 성상의 하교에서는 “본정(本情)은 다른 뜻이 없었다.” 하시고 방석(放釋)의 은전이 생전에 누차 내리고 복관(復官)하라는 명이 사후(死後)에 뒤따라 내려졌으며, 성상께서 등극하신 당초에 또 전조(前朝)에서 사면했던 은전을 거듭 내리셨으니, 선생이 무함을 입었다는 사실은 이미 전후의 성명(聖明)께서도 살펴 아셨던 것이며, 예전에 요로(要路)에 있던 이들도 이미 실상을 살펴보고 구해(救解)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선생에게 보복하려는 자들이 마음대로 죄명을 만들어 마구 헐뜯어 마침내 성상의 은택이 막혀서 아래로 흐르지 못하고 지극한 통원(痛冤)이 울결(鬱結)하여 밝혀지지 못하게 하고 말았으니, 아아, 또한 참혹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유현(儒賢)이 참소에 걸려들고 충신이 억울한 죄를 받은 것 중에 이처럼 혹심한 경우가 어디 있었습니까.

생(生) 등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영남의 사풍(士風)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무릇 정도(正道)를 보위하는 데 관계되는 일이면 목숨을 던지며 앞을 다투어 나서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어른에 대해서만은 아직 한 번도 신원(伸冤)을 호소한 적이 없었던 것은 비록 시의(時宜)에 맞지 않았고 본가(本家)에 화가 미칠까 염려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비들의 의기(義氣)가 예전만 못하여 그런 듯합니다. 이제 성상이 새로 등극하여 총명을 사방으로 틔우시니, 무릇 억울하고 원통한 이들이 차례로 신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선생을 위해 한 번 신원을 호소하는 것을 이때에 하지 않고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혹자는 “지금 조정 의론이 아직도 성상의 뜻에 따르지 않고 버티는 듯한 혐의가 있으니, 이러한 때 상소해서는 신원을 받을 가망이 없을 듯하다.” 하는데 생 등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남(南)ㆍ최(崔)ㆍ윤(尹)ㆍ이(李) 등 재상들은 그 당시 요로를 맡았던 영수(領袖)들입니다. 전인(前人)이 당시에 이미 구원할 것을 논의하였는데 후인이 도리어 금일에 억누른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금 이 거사는 성패와 이둔(利鈍)을 기필할 수 없는 것으로 젖혀 두고 오직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세상에 의혹을 풀고 후세에 할 말이 있고자 하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생 등은 이에 폐부(弊府)의 사림들과 본 고을의 향교에 모여 의논하여 견해의 합일을 보고 날짜를 잡아 상경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감히 열읍의 동지 군자들께 두루 포고하여 분연히 일어나 함께 호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바라건대 첨존(僉尊)께서는 저마다 척념(惕念)하여 힘을 내고 함께 뜻을 모아 이 대사(大事)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2월 7일에 원근의 사림이 일제히 모여 향교의 청아루(菁莪樓)에 소청(疏廳)을 설치하였다. 이에 본부(本府)의 호계(虎溪)ㆍ삼계(三溪)ㆍ병산(屛山)ㆍ주계(周溪)ㆍ청성(靑城)ㆍ경광(鏡光)ㆍ구계(龜溪)ㆍ도연(道淵)ㆍ노림(魯林)ㆍ물계(勿溪)ㆍ사빈(泗濱) 등 각 서원, 묵계(默溪)ㆍ이계(伊溪) 두 정사(精舍), 도연(陶淵)ㆍ오계(梧溪)ㆍ구담(龜潭)ㆍ복천(福川)ㆍ송파(松坡)ㆍ감천(甘泉)ㆍ구담(九潭)ㆍ도촌(道村)ㆍ송천(松川)ㆍ주촌(周村)ㆍ수곡(水谷)ㆍ물야(勿野)ㆍ타양(沱陽) 등 각 서당, 태사묘(太師廟)ㆍ향청(鄕廳)ㆍ의국(醫局)이 통문(通文)에 답하고,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대구(大邱)의 이강(伊江)ㆍ남강(南岡)ㆍ연경(硏經) 세 서원, 영해(寧海) 교원(校院), 의흥(義興) 교원, 인동(仁同) 향교, 연일(延日) 교원, 순흥(順興) 교원, 영양(英陽) 교원, 봉화(奉化) 교원, 비안(比安) 교원, 청송(靑松) 송학서원(松鶴書院), 자인(慈仁) 교원, 경산(慶山) 교원, 상주(尙州) 옥성서원(玉成書院), 선산(善山) 교원, 성주(星州) 교원, 용궁(龍宮) 교원, 풍기(豐基) 교원, 현풍(玄風) 교원, 창녕(昌寧) 교원, 영산(靈山) 교원, 함안(咸安) 교원, 진보(眞寶) 교원, 의성(義城) 교원, 청도(淸道) 선암서원(仙巖書院), 칠원(漆原) 교원, 영덕(盈德) 교원, 영천(永川) 교원, 김해(金海) 교원, 경주(慶州) 교원, 금산(金山) 향교, 진주(晉州) 향교가 통문에 답한 뒤에 매일같이 이어 와서 모였다. 진주 유생 이태로(李台老), 영양 유생 조석규, 청도 유생 이석재(李碩材)ㆍ박증원(朴增遠), 밀양 유생 이연(李演)ㆍ안명하(安命夏), 창원 유생 김상정(金尙鼎), 김해 유생 이진휘(李震徽), 군위(軍威) 유생 홍유귀(洪有龜)ㆍ이태준(李台俊) 등은 각자 서찰을 본부(本府)에 보내왔다. 부백(府伯) 이인복(李仁復), 울산 부사(蔚山府使) 홍상빈(洪尙賓), 언양 현감(彦陽縣監) 이태망(李台望), 영해 부사(寧海府使) 홍상인(洪尙寅), 용강 현감(龍岡縣監) 유경시(柳敬時), 옥구 현감(沃溝縣監) 박숭고(朴崇古), 오수 찰방(獒樹察訪) 김태화(金泰華), 진주 목사(晉州牧使) 황유(黃瀏), 우병사(右兵使) 조진한(曺鎭漢), 진주 영장(晉州營將) 백수일(白守一)도 서찰을 보내어 일을 물어 왔다.

3월 3일 행단(杏壇)에서 개좌(開坐)했다. 공사원(公事員) 상사(上舍) 박용상(朴龍相)과 상사 김성흠(金聖欽)이 소수(疏首)를 권점(圈點)으로 뽑자는 뜻을 좌중에 알렸다. 소수 추천이 나오자 수천(首薦)은 개령(開寧) 상사 이수인(李壽寅)이고, 부천(副薦)은 경주 상사 이덕록(李德祿)이고, 말천(末薦)은 본부(本府) 상사 안노석(安老石)이었다. 이에 권점을 하니 수천이 뽑혀서 좌중에서 나와 앉아서 상사 박이상(朴履相)과 상사 김광국(金光國)을 소색(疏色)으로 삼고 배소유생(陪疏儒生)을 분정(分定)하고 명석(命錫)을 일행의 관리자로 삼았다.

6일에 출행(出行)할 즈음에 행단에 모였는데 찬인(贊引) 권몽규(權夢揆)가 소수를 이끌고 외청(外廳)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오후에 길을 나섰는데 지나는 주현(州縣)마다 선비들이 많이 모여서 전송해 주었다. 14일에 도성에 들어갔고 18일에 소장을 받들고 궐하(闕下)에 이르러 소개(疏槪)를 바치니, 후원(喉院)이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4월 1일까지 하루도 복합(伏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소개를 고쳐서 정원(政院)을 준엄히 꾸짖은 것이 다섯 차례였으나 끝내 정원이 소장을 봉입(捧入)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세상 어찌할 수 없어 함(函)을 받들고 물러났다. - 전후로 낙중(洛中)의 친구들 및 경외(京外)의 사람으로서 사환(仕宦)하느라 도성에 있는 이들이 연이어 찾아와 참여했는데 너무 숫자가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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